에단 호크

1.
<Reality bites>, <Before sunrise>, <Before sunset>
에단 호크가 나오는 영화로 기억나는 세 영화. 자연인 에단호크가 늙어가며, 영화속 에단 호크도 늙어가는 것 같아서 좋다. 그런 에단호크가 소설을 썼단다. 도서관 서가에서 '에단 호크'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그냥 집어왔다. 남자 주인공도, 여자 주인공도 모두 에단 호크 같다.
- 조금 신경질 적이고, 약종류들에 취해 있고, 마음 속 상처가 있고, 그래도 어찌 어찌 잘 해 보려고 발버둥을 쳐보고. (그닥 발버둥으로 보이진 않지만)

2.
크리스티(여주인공)의 결혼식에 온 아버지가 하는 말,
"크리스티는 마음먹은 건 뭐든지 이뤘지. 하지만 크리스티는 이기는 걸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았단 말이야. 얘는 삶을 엉망으로 만드는 게 더 근사하다고 생각했다니까."
20대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던 거 같다. 그런데, 그 때는 그게 삶이 엉망으로 되는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문국현

문국현 후보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마치 허경영 후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뜬금없었다. 유한킴벌리 사장이란 얘기를 들었을 때는 더더욱 뜬금없었다 해야 하나.

그러나 나라걱정 하느라 자기 공부도 뒷전에 미루고 있는 지인의 소개로 오마이뉴스가 주관한 문국현과 이인영 후보의 대담을 보니, 왜 문국현인지 적어도 하나는 이해가 갔다. 적어도 문국현은 지금 땅에 발붙은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야 민주노동당도 계속 얘기해 온 것인데, 왜 문국현의 얘기가 더 진정성을 가진 것처럼 들리는 것인가? 문국현의 두 딸들이 비정규직이라서? 뻔해 보이지만, 이것도 맞다. 게다가 문국현은 사장인데, 사장 딸이 비정규직이고 반실업 상태라니 말이다.

프레시안 기사에서 이 점을 꼭 집어 지적하고 있다. 즉 학벌사회에 대해 염증을 느낀 대중들이 노무현 후보에 대해 가졌던 감정과 비슷하게 어려운 경제에 이골이 난 대중이 사장님 후보에 갖는 기대라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에 대한 담론은 성숙하지 않은 채, 그 얘길 꺼내는 대통령이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착각하는 것 말이다.

앞으로 남은 대선국면이 바로 그 담론을 생산해 내는 가장 효과적이고 중요한 시기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시간도 별로 없는데, 이명박의 대운하 깨기나 하고 있는 것보다는, 후보의 입을 빌어서라도 지금 당면한, 시급한, 절절한 문제들이 나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랜드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민주노동당보다, '한국에서 4년제 졸업한 여대생이 비정규직으로 있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라고 말하는 문국현이 오히려 현재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의 실태를 더 설득력있게 얘기하는 거 아닌가?


수단

수단 다르푸르, 성폭행 정부군

"수단에 석유가 없었다면, 그래서 별 볼일 없는 나라였다면, 국제사회가 수단 정부의 동의 없이 사태를 어떻게든 수습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별 볼일 없는 나라’이기에 다르푸르 비극을 그야말로 강 건너 불로 여길 것이다. ‘인도주의’ 깃발을 내걸고 개입해봤자, 챙길 이득이 없는 탓이다. 이래저래 다르푸르 흑인 난민들의 삶은 엉망이 됐다. 국가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비정한 국제질서의 희생양이 바로 그들이다."

결국 '인도주의 깃발'도 이득이 있는 곳에 꽂히는 것이라는 건데, 그걸로 끝인가? 10년도 더 넘게 지속되어 온 일인 거 같은데...

수단, 다르푸르 평화유지군 수용

지난 6월에 수단이 평화유지군 수용의 뜻을 밝혔군요.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들리지 않는 고통

'이들을 위해 누가 소리쳐 줄 것인가'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지부장인 김희진씨가 국제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소개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이스라엘, 엘살바도르, 페루, 아르헨티나, 중국, 콩고민주공화국, 수단 등 8개국의 사례로 나오는 여성들의 고통은 짧은 몇 문장 만으로도 속이 먹먹해져온다. 
이들의 고통은 왜 들리지 않는 것일까? 이들을 위해 소리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인가?



어머니 노동자들?

2007년 현재 서울발 기사들에서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단, 이 여성노동자들은 하얀 제복을 입은 여경들에 의해 끌려나간다. 1970년대에 비해 여성의 경찰직 진출은 더 많이 늘었고, 시위 진압과정에서 성폭력이 불거질 수 있다는 것도 이젠 안다. 그런데 왜 끌려나가는 여성 노동자들이 눈물은 그대로인가. 아니 그 눈물도 각양각색일텐데, 그 눈물을 해석하는 눈에서 구태의연함이 보일까?

오마이뉴스에서 한겨레 신문의 홍세화 칼럼니스트가 이랜드 파업 현장을 '취재'한 것을 기사로 올렸다. 홍세화 위원은 칼럼니스트로서가 아니라 기자로서 현장을 방문하여 여성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사진도 찍고 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런 홍세화 위원의 취재재도 기사화되었다. 여하튼 그 기사에서 "어머니 노동자"란 말에 팍 꽂혔다. 우선 인용부터 하고 다시 찬찬히 짚어보자. 

(위 기사에서 인용)[홍세화씨 말하길] "어머니 노동자 얼굴에 피곤함이 역력하다, 점거 20일째가 됐으니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을 꼽아달라는 요청에 이날 방문한 '어머니 노동자들'의 투쟁이라고 답했다. 노조원 대부분이 중년 여성인 것에 대해 "짧은 시간에 세상이 어떤 것인지 직접 겪으면서 이해하게 될 것"이라며 "투쟁 현장이 곧 학습 현장이 됐다"고 말했다.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지 않던 40대 전후의 어머니들이 이처럼 파업에 나서야 할 만큼 모순적 상황"

1) 여성 노동자로 불러달라, 그것도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로!

많은 신문에서 이번 이랜드 파업을 주도한 여성 노동자들을 '아줌마 노동자' 부르던데, 이건 아줌마도 아니고, 어머니라니. 이들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아이들 학원비를 벌기 위해, 생계를 위해 저임의 비정규직도 가리지 않고 나온 어머니들 맞다. 그러나 지금 홈에버 바닥에 라면박스 깔고 누운 이들은 누구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지금 아이 담임선생님을 찾아 간 학부모들이 아니란 말씀이다. 설사 이들이 인터뷰에서 집에 두고 온 애들 생각에 눈시울을 붉혀도, 그건 기혼 여성 노동자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일 뿐이다. 노동자이면서 육아와 가사노동 일체를 책임지고 강요받는 기혼 여성 노동자의 위치.
이런 여성 노동자들을 '어머니'로 '아줌마'로 부르는 것의 효과는
1) 대중적 호소력. 무릇 여성의 눈물, 그것도 사지를 부여잡힌채 절규하는 여성의 눈물은 많은 이들의 (마우스 클릭하는)손가락과 눈을 사로잡는다. 노조위원장이 말하듯, 이번 이랜드 파업이 기존의 다른 파업과 달리 많은 지지를 받는 이유에는 분명 이 '아줌마', '어머니'들의 호소력이 컸다. 그러나 이것은 근시안으로 바라보았을 때, 긍정적 효과에 불과하다.
2) 두 번째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미칠 부정적 효과로, 이랜드 파업을 비정규직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불쌍하고 가난한 아줌마들의 이야기로 만든다. 지금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랜드 불매 운동이 불쌍하고 가난한 아줌마들을 못살게 군 사업주를 따시키는 운동이 아니라, 제2의 제3의 이랜드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이들을 아줌마, 어머니 노동자에 가두어선 안된다. 물론 이랜드 기업의 기독교를 앞세운 노동착취실태는 전국민에게 알리고, 불매운동을 해도 모자랄 판이라는데는 적극 동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제2의, 제3의 이랜드는 아닐지 의심하고, 물어보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홈에버로 가는 발길을 홈플러스로 돌린다고 될 일이 아니라, 그럼 홈플러스는 괞찮은가? 이마트는 괜찮은가? 다른 비정규직은? 나는?

2) 어머니들의 학습현장?

두 번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어머니들의 투쟁을 학습 현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이 이 참에 "세상이 어떤 것인지 직접 겪으면서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아니 이 여성 노동자들이 그동안 이해하고 있던 세상은 그럼, 딴세상이었나? 물론 이들의 인터뷰내용중에, 예전에는 몰랐던 노조, 파업, 비정규직,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저 잘 알게 되었다는 얘기가 나오긴 한다. 그러나 그 말을 가지고 이 여성노동자들을 순식간에 세상이 어떤지 모르고 살았던 사람 취급할 수 있는가? 원래 사람이 자기가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피부로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사는 일에 허덕거리던 그들이 노조와 파업, 이런 것들을 노조위원들만큼, 그리고 홍세화 위원만큼 다 알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노조위원이나 홍세화 위원들의 할 일이 없어지는 거 아닌가? 홍세화씨는 자기가 알고 있던 세상을 이제, 이 어머니들도 알게 되었다고 뿌듯해 할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자신이 모르고 있던 세상을 배우는 학습의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그 어머니들의 삶이란 남편이 아이들이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의식과 능력을 키우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생존능력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일어나 밥차리고, 애들 학교 보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공과금 챙기고, 나가서 돈도 벌고, 하루가 끝나면 몸이 자근자근 쑤시는 이들에겐, 드라마를 보며 몸과 마음을 쉬이게 하는 시간도 확보하기 어렵다.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지 않던 40대 전후의 어머니들이 이처럼 파업에 나서야 할 만큼 모순적 상황"이라. 이 표현이 전제하고 있는 가정. 1) 40대 전후 어머니들은 사회에 대한 무비판적이다. 2) 무비판적인 어머니들이 파업을 하는 것은 모순이다? 사실 2)번은 1)번의 전제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모순이라는 것이지? 뭐가 모순이라는 것이야? 1)번이 맞다면 전혀 모순이 아니잖아. 즉 사회를 무비판적으로 바라보던 40대 전후의 어머니들까지 파업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지금 현 상황이 얼마나 정말적인가를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근거일 텐데, 뭐가 모순이라는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지금 40대 전후의 세대는 우리 세대에서 386세대로 불리는 바로 그 세대들 아닌가? 386을 아주 광범위한 출생코호트의 의미로만 본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사회에 무비판적이다? 우선 사는데 급급해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 어려웠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이 여성들만의 이야기인가? 비판할 수 있는 능력과 짬이 허락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나 이 여성들 마냥 40대 전후의 여성들, 애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돈 나갈 구멍은 점점 커지는데, 돈 들어올 구멍은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홍세화나 노조위원들의 입장에서의 그 '사회 비판 의식' 같은 거, 끼어들 자리 없다.

이 아줌마들, 어머니들이 비정규직에 눈감게 만드는 사회, 입만 열면 시댁욕에, 남편자랑, 애들 자랑에 단내나도록 떠들게 만드는 사회, 지하철, 버스 빈자리를 향해 몸을 던지게 만드는 이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먼저 보고, 이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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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님은 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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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당을 나온 암탉
4. 거짓말쟁이와 모나리자
5. 클로디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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